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

written by Esoruen






어른거리는 옆모습이 겨울바람에 흩어지는 계절의 일.





4강전의 하루 전 날, 그날의 경기가 전부 끝난 저녁. 라쿠잔의 숙소 분위기가 어느 때와 달리 살벌했다. 평소와 달리 표정을 구긴 미부치는 창밖과 자신의 주장을 번갈아보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고 네부야는 졸린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라쿠잔의 위엄 있는 주장, 아카시 세이쥬로도 조금의 곤란함과 걱정, 그리고 노기가 섞인 표정으로 방안을 느릿하게 돌아다녔다.



"이걸로 약 4시간째군"

"정말이지, 왜 안 오는 거야!"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미부치가 벌떡 일어섰다. 그 소리에 놀란 네부야가 졸다가 깨어 아카시에게 물었다.



"뭐야 아직 안 왔어? 좀 있으면 자정이라고"

"그렇군."



덤덤히 대답한 아카시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자신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4시간 전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라쿠잔의 스몰 포워드, 하야마 코타로의 것이었다. 핸드폰까지 두고 외출해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합은 내일. 아무리 아카시라고 하더라도 화가 나는 것은 화가 나고 거슬리는 일이었다.



"역시 찾으러 가봐야…"

"쉿, 레오. 진정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의 미부치를 진정시킨 아카시는 방문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자정까지는 앞으로 3분,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째깍, 째깍, 초침의 전진조차 방안의 침묵을 짓누르는 고요함 속, 멀리서 부터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발소리가 끊기고 방문이 열리자, 세 사람이 이제까지 기다려온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늦어서 미안해!"

"코타쨩~!"



무사해 보이는 얼굴에 미부치는 잠시 안심한 듯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내 표정을 팍 구기고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야무진 그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정말이지! 사람 걱정시키지 마! 핸드폰까지 두고 가고!"

"미안 레오누님! 네부야도, 아카시도 미안해!"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하야마는 주장인 아카시와 졸고 있는 네부야에게 사과의 인사를 날렸다. 네부야는 왔으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누웠지만 아카시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많이 화난 것인가, 심장이 덜컹하는 감각에 하야마가 어색하게 웃었다. 감독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무서운 자신의 주장에게 만큼은, 미운털이 박히기 싫었다. 아카시는 곤란해 하는 표정의 하야마에게,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코타로, 윈터컵이 끝나고 난 뒤, 교토에서 훈련 기대해. 대신 감독님께 오늘 일은 비밀로 해주지"

"앗… 아카시이…"



처벌에 항의하려던 하야마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감독에게 알려졌다간 더 혼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하드한 훈련이 나을 거라 판단한 것이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아카시도 고개를 끄덕여주고, 자신의 손에 꼭 쥐여있던 그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미부치의 손에서 살짝 빠져나온 하야마는 자신의 핸드폰을 받고는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난 자러갈게! 레오누님도 아카시도 잘 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해!"



어느 때와 같은 잔소리를 넉살좋게 들은 하야마는 자신의 숙소로 바람과 같이 사라져버렸다. 드디어 잘 수 있겠군, 아카시가 한탄하듯 중얼거리고 먼저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미부치는 네부야가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어디 갔다가 왔기에 이렇게 늦었는지 묻지 않은 것을 안 것은 침대에 눕고 나서였다. 하야마는 피곤한 몸을 침구에 부비며 팀메이트들의 문책을 피한 것에 대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 물어봤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하지 않고 싶었으니까.

킥킥, 장난스러운 웃음을 삼키며 그는 눈을 감았다.


 


 


 


 



"코타로, 져지는 어디 둔거지?"

"에?"



사건은 오늘 저녁식사 후 숙소에 돌아와 쉬고 있을 때 일어났었다. 약 7시 경, 네부야의 방에 모여 슈토쿠와의 4강에 대해 작전회의를 하고나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모두가 져지를 입고 있는 중 하야마 혼자 벤치웨어 하나만 달랑 입고 있는 것을 아카시가 지적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주장의 날카로운 지적에서야 하야마는 자신이 져지를 잊고 온 것을 알아채고, 모두에게 금방 찾아올 테니 기다려, 라고 하곤 숙소를 나갔다. 이때, 그는 중요한 실수를 하나, 아니 둘을 해버렸다.

첫 번째는 핸드폰을 놓고 가버린 것. 두 번째는…



"…어디다 뒀지?"



자신이 어디에서 져지를 벗었는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흘렸다고 하면 누군가가 학교 로고를 보고 숙소로 가져다 줬을 테고, 락커룸을 나갈 때 까지만 해도 분명 입진 않았어도 손에 들고 있었다. 식당부터 다시 가봐야 할까, 혼자 길거리에서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하야마는 결국 오늘 돌아오며 들린 곳을 전부 가보자는 간단명료하고 확실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론 무식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숙소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 식당, 그리고 귀갓길을 걸어가던 하야마의 눈에,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숙소로 오다가 네부야가 배가 덜 찼다며 햄버거를 잔뜩 사왔었다. 그때 자신도 따라갔었지만, 설마 저기 두고 왔을 리가. 자신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자부한 하야마는 자랑스럽게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 있습니다!"



직원은 하야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영업용 미소를 근사하게 지으며 그의 져지를 건네주었다. 계산하고 갈 때 떨어뜨린 것을 주웠다는 설명까지 듣고 나자 하야마는 부끄러움과 묘한 창피함에 받아든 져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도 찾아서 다행인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서서 걷는 순간, 코타로는 무언가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으악!"

"어어?!"



두개의 감탄사와 함께,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리에 가게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하야마에게 향했다. 손에 쥐고 있던 져지는 넘어지며 놓고 말았고, 손에는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감각만이 느껴졌다. 불안함에 정신을 차리고 넘어져있는 그대로 주변을 둘러보자 자신과 같이 넘어진 남자가 정면에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주황색 져지, 옅은 색의 머리칼. 자신의 져지는 남자의 옆에 떨어져있었다.



"어이, 앞 좀 보고 다녀! 확 쳐버릴까…"



자신을 향해 버럭 소리친 남자는 일어서려다 비어버린 자신을 손을 보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인공적인 단 냄새. 끈적이는 손을 바라본 하야마도 얼굴이 굳고 말았다. 이건 분명…



"내 콜라"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일어서 바닥에 쏟아진 자신의 콜라를 보았다. 다행히 져지와 반대 방향으로 떨어져 옷은 젖지 않았지만 바닥과 손, 그리고 입은 옷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미, 미안! 변상할게!"



져지를 주워들고 벌떡 일어나 사과를 하던 하야마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움찔했다. 같이 넘어져 있을 때도 자신보다 커 보이긴 했지만 서서 마주보니 남자는 족히 10cm는 커보였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하야마는 기억해내고 말았다. 아까 작전회의 데이터에서 본 얼굴, 내일의 경기 상대, 슈토쿠 고교 3학년, 자신과 같은 스몰포워드.



"미야지 키요시?"

"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이 의아해 하야마를 가만히 보던 미야지는 그의 옷차림을 보고 다시 한 번 표정이 구겨졌다. 져지에 선명히 새겨진 라쿠잔 로고를 본 것이었다.



"내일 경기상대를 이런데서 볼 줄이야, 재밌네."

"그러게~ 아, 콜라는 사줄게! 표정 풀어!"

"됐어, 얼마 한다고"



물티슈로 손과 옷을 닦은 미야지는 굳이 사주겠다는 하야마의 호의를 무시하고 카운터로 가 콜라를 사왔다. 화장실로 가 손을 씻고 나온 하야마는 그대로 돌아갈까 하다가 가게를 나오는 미야지를 따라갔다. 세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그를 쫒아가며 하야마가 입을 움직였다.



"있지, 왜 혼자 나온 거야?"



미야지는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갈 길을 갔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하야마의 호기심만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역시 콜라 값, 줄게!"

"필요 없다니까"

"미야지~"



멈칫. 앞서가던 미야지가 멈춰 섰다. 드디어 대화해 줄 마음이 든 걸까. 들뜬 하야마의 기대는 돌아선 미야지의 표정을 보고 산산 조각났다. 분명 웃고 있는데, 눈에는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는 느꼈다. 지금 이 사람은 화났다. 그것도 많이!



"너, 2학년 아니냐?"

"응! 근데?"

"어디서 막 이름을 불러?"



아, 그것 때문이었구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봤자 이미 늦었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의 미야지는 정말이라도 하야마를 한대 칠기세로 내려다보고 있었고 말이란 것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자, 잘 못했어 미야지씨!"

"……됐어 거슬리니까 가"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 단칼에 돌아서는 모습, 그 무엇을 봐도 거절의 의지만 보이는 미야지였는데도 하야마는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걸어가는 그를 소리 죽여 따라가며 하야마는 먹잇감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위 아래로 그를 훑어봤다.

그리고 슈토쿠 숙소 앞에서, 미야지가 한 번 더 멈춰 섰다. 이크, 들킨 건가. 온몸의 털이 서는 듯 팽팽한 긴장감에 하야마는 숨조차 멈추었다. 허공을 향해 나른한 한숨을 쉰 미야지는 머리를 긁적이고 물었다.



"이까지 따라왔으면 됐잖아, 가"

"에, 그러니까… 아직 화났어?"

"안 났으니까 가"

"그럼 왜 예민한 거야?"

"난!"



버럭 소리를 지른 미야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호흡을 멈추고 있던 하야마는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곱상한 얼굴에 놀라 숨을 내뱉었다. 복잡 미묘한 표정에는, 짜증과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안함과 비슷한 무언가가, 안에서 부터 얼핏 그 그림자를 비출 뿐.



"내일 경기가 마지막일수도 있어, 그래서 예민하니까 가. 게다가 넌 내일 상대잖아? 무관의 오장은 내일 시합이라도 한가하게 상대 선수나 쫄래쫄래 쫓아다닐 여유가 나오나본데, 난 아니니까 꺼져"



참아온 말들을 잔뜩 쏟아낸 미야지는 멍해져버린 하야마를 슬쩍 노려보곤 돌아섰다. 숙소로 돌아가서 잠이나 잘 테다. 그렇게 다짐하고 가려는 순간, 새하얀 손이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다.



"잠깐!"



분명 자신보다 작은 체구이거늘,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미야지를 확 끌어당긴 하야마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질 수 없단 듯, 자신의 불만을 토해냈다.



"난 그냥 풀죽어 보여서, 걱정되어 따라온 거라고! 그리고! 나 안 한가해! 그냥 네가, 아, 아니 미야지씨가 걱정되어 따라온 거야!"



제 할 말을 다 하고 나서야 미야지 팔을 억세게 쥐고 있던 손은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미야지의 표정이 이상했다. 보통이라면 화를 내어야 정상일 텐데, 분노보단 순수한 놀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걱정? 날?"

"그래!"

"너 바보냐? 날 왜 걱정해?"

"그냥?"



미덥지 않은 대답에 미야지는 그게 뭐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녀석은 종잡을 수가 없다. 자신의 언제나 쳐버리고 싶은 1학년 후배 콤비보다 훨씬 더. 미야지의 반응에 하야마는 스스로도 민망한지 뒷걸음을 치며 자리를 떠나려했다.



"어, 어쨌든 거슬린다니까 갈게! 내일 시합 잘 부탁해 미야지씨! 계속 예민하면 따뜻한 우유 먹고자! 안녕! 내일 봐!"



어린애처럼 손을 붕붕 흔든 하야마는 자신을 바라보는 짜게 식은 두 눈을 뒤로한 체 뛰었다. 어쩐지 내일의 시합이 조금 더 기대가 되게 되어, 평소에도 빠른 발이 더 가볍게 느껴진 그였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아"



달리던 그가 멈춰선 곳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낮선 길이었다. 그렇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슈토쿠 숙소까지 따라 간 그 상태에서 어딘지 보지도 않고 뛰어간 덕분에 그는 완벽히 미아가 되고 말았다.



"…맙소사"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안 것도 그때였다. 그렇게, 하야마는 몇 시간을 헤매다가 겨우 자정이 되기 전 라쿠잔 숙소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오늘 벌어진 일을 곱씹던 하야마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 경기장에서 만나면, 눈인사라도 건네야지. 그리고 두 번째 대면은 코트위에서, 공을 두고 하리라. 그런 사소한 결심을 하며 소년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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