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 上

written by Esoruen



도쿄의 이른 아침, 삼일 째 내리는 비는 도저히 그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유명 명문대인 D대 근처, 대학가에서 조금 떨어진 주거지의 단칸방은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방의 구석까지 빛이 가득했다. 인공적인 차가운 빛이 거슬렸던 걸까, 미야지는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반쯤 깨어난 의식은 불쾌하다.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이불속에서 꼼지락 거리던 머리가 결국 이불 밖으로 나왔다. 잔뜩 짜증난 표정으로 이불 밖으로 나온 그는 터벅터벅 스위치를 향해 걸어갔다. 버클 풀린 청바지가 걸을 때 마다 조금씩 흘러내리려 했지만 추슬러 올리는 손은 없었다. 겨우 불을 끈 미야지는 재빨리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이 이불과 마찰하는 소리, 색색거리는 숨소리까지 모두 침구에 스며들 정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으로 다시 빠져들려던 그때. 단칸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운동화가 걸어 들어왔다.


덜컹.


터벅터벅. 발소리는 현관에서 멈췄다.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안은 다시 형광등 빛으로 가득 찼다. 이불속으로 더 깊게 파고드는 미야지를 그 자리에서 서서 멍하니 보던 하야마는 편의점에서 사온 물건들을 바닥에 제멋대로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분명 누가 들어온 것인지 알 텐데, 파스텔 톤의 이불은 미동도 없었다. 그 이불을 억지로 잡고 끌어 내리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미야지가 보였다. 잠이 덜 깬 건지, 방안의 빛에 반응해 몸을 더 웅크리자 바깥의 찬 기운이 서린 억센 팔이 허전한 어깨를 잡아 눌렀다.


"미야지씨, 일어나. 아침이야"


정자세로 눕혀진 미야지는 실눈을 뜨고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어젯밤 자신과 같이 이불속을 뒹굴었던 남자, 제 어린 연인. 역광의 얼굴 표정은 보이질 않았지만 그 동그란 눈만큼은 선명히 보였다.


"불 꺼"


어깨를 잡은 팔을 쳐내고 상체를 일으키며 처음 내뱉은 말은 저런 것이었다. 어서와 라던가 어디 갔다 왔냐는 다정한 인사는 없었다. 내쳐진 손을 만지작거린 하야마는 스위치 대신 미야지의 바로 옆, 체온이 바로 느껴지는 거리만큼 가까이 앉은 후 잠이 덜 깬 제 연인을 으스러뜨릴 듯 껴안았다.

억센 두 팔에서 느껴지는 습기 찬 냉기, 비를 맞은 것도 아닐 텐데 그 두 팔엔 비 냄새가 잔뜩 스며들어있었다. 방안에 놓여있는데도 마치 비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지독한 습기. 모든 게 그저 짜증이 나 두 팔에게서 벗어나려 미야지가 발버둥 쳐도 결국 그 팔 안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이 하야마의 눈엔 그저 요람 안에서 꼼지락 거리는 아이처럼 보일 뿐 이었다.


"배고프진 않아? 나 맛있는 거 사왔는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은 하야마는 편의점 상표가 그려진 배부른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만 저어 거절의 의사를 정한 미야지는 축 늘어져 하야마의 가슴에 기대었다. 계속되는 장마, 매일 밤의 밤일에서 온 무력감이 식욕마저 앗아갔다.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고 싶어. 미야지가 하야마에게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이 단칸방은, 작은 소리도 다 두 사람의 귀에 들어올 정도로 좁았으니까.

하야마의 집인 이 단칸방은 그 허름함에 비해서 상당히 센 가격을 자랑했다. 비싼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역이 가까웠고, 정류장도 가까웠으며, D대의 근처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D대에 다니지도 않는 하야마가 이곳을 거주지로 삼은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올해 봄, 미야지가 D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야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학수속을 밟은 것이었다. 아카시의 반대도, 미부치와 네부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야마는 라쿠잔을 떠나 슈토쿠로 전학 갔다. 이미 미야지가 졸업한 슈토쿠는, 그에게 큰 의미가 없었지만 어차피 도쿄에 있는 고등학교중 한곳을 가야한다면 슈토쿠를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슈토쿠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었다. 무관의 오장중 한명인 그의 합류가, 팀에 이득이 되면 되지 손해가 될 리는 없었다.

비록, 6개월간은 시합에 못 나가지만 말이다.

그렇게 전학 온 그는 슈토쿠 고교 근처가 아닌 미야지가 다니는 D대 근처에 방을 얻었다. 그리고 멀쩡히 제 집에서 사는 미야지에게가, 같이 살아달라고 애원했다. 팀도, 동료도, 가족도 다 버리고 온 자신과 있어달라고, 자신의 헌신을 호소하며 미야지에게 부탁했다. 며칠을 그렇게 조르자, 결국 미야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게 시작된 동거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집안일은 서로가 알아서 하고, 생활비는 부모님에게 조금 신세를 지고 모자라면 단기 아르바이트 같은 것으로 각자가 벌어서 썼다. 굳이 따지자면 '생활'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간혹 미야지가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그것으로 인해 말싸움을 하거나, 심지어는 주먹싸움으로 서로를 상처 입히거나 하는 날이 분명 있었기에 하야마는 그것이 싫었다. 모든 걸 당신을 위해 한 일인데, 변명하듯 투덜거리는 것도 혼잣말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는 자신의 애인에게 쓴 소리를 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으니까.


"놔 봐"


어린애를 달래 듯, 하야마의 머리를 토닥이며 명령하고 나서야 미야지는 겨우 그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화장실로 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어 정신을 차린 그는 어젯밤 벗어놓은, 정확하게는 하야마가 벗겨 놔준 티셔츠를 집어 들어 입었다. 사온 물건을 들어 뒤적거린 미야지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더니 결국 짜증을 내며 하야마를 돌아봤다.


"또 인스턴트냐?"

"하지만 요리 귀찮은걸"

"이래서 너랑 살기 싫어"


아무렇지 않게 독설을 내뱉은 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이며 컵라면과 레트로 식품을 꺼냈다. 집에 장봐놓은 것이 떨어지거나 적당히 때울 것이 없을 때면 늘 하야마는 이런 것을 사왔다. 요리는 대부분 미야지의 몫이니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일 텐데 그걸 미야지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사온 것을 어찌하겠는가. 물을 끓이고, 전자레인지에 레트로 식품을 넣고 돌리며 수저를 챙긴 미야지는 작은 밥상 위에 조촐한 아침식사를 차렸다.


"어라, 미야지 배 안 고프다며?"

"네가 배고프잖아 멍청이"


물을 부은 컵라면을 얌전히 밥상 앞에 앉아있는 하야마에게 내밀며 작게 한숨 쉬는 입술은 살짝 부어있었다. 분명 어제, 지칠 정도로 키스해서일 것이다. 따스한 김을 토해내는 컵라면을 보고 있던 하야마는 미야지의 팔을 잡아, 도로, 이부자리에 눕혔다.

힘없이 픽 쓰러져 이불 위로 내던져진 미야지는 이건 뭐하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 얼굴로 어느새 제 위로 올라탄 하야마를 보았다. 살짝 들뜬 얼굴, 동그란 생김새와는 달리 진득한 시선을 쏘아내는 눈, 언제나 밤마다 마주하는 그 얼굴.


"뭐하냐?"

"별로 배 안고파. 그러니까"


말 대신 이어지는 것은 진부한 키스, 부드럽지만 빠르게 살짝 부어오른 입술을 탐한 그가 못 먹어 더 마른 미야지의 허리를 껴안았다. 형식적인 마찰과 자극이 끝나고, 두 얼굴이 멀어져도 미야지의 표정은 그저 조금 상기되었을 뿐 얼음장처럼 굳어있었다.


"피곤해, 싫어"

"싫어, 할래, 나 밥 안 먹어도 돼 나중에 먹어도 돼"

"멍청아 라면 불어"

"상관없어 그러니까"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며 싫다고 하는 미야지에게 매달리듯 다시 그 입술에, 목에, 쇄골에 키스를 퍼부은 하야마는 이마를 마주하고 지그시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절대 어긋나지 않는 간격, 서로의 숨의 따스함이 지독하게 뜨겁게 느껴지는 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야마는 다시 그 입술에 사랑을 퍼붓지 않고 그저 미야지의 시선을 옭아매었다. 새하얀 얼굴에, 일순 빛이 번쩍였다. 깜박. 깜박깜박. 오래된 형광등이 깜박일 때마다 시야가 번쩍여 미야지는 눈을 감았다.

싫다고 하지 말아줘.

자신을 더 이상 보고 있지 않은 미야지를 향해, 하야마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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